성경, 기독교

하나님의 성품

아이자야 2023. 4. 25. 03:28

하나님의 성품

2013.6.8

얼마 전에 즐겨듣는 노래 중 하나인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맥 더 나이프'의 가사의 내용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경쾌한 곡 분위기와는 달리 가사는 '맥기'라는 칼잡이가 저지른 범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원래 '서 푼짜리 오페라'라는 제목의 오페라에서 나오는 노랜데, 암스트롱 아저씨가 부른 것은 재즈풍으로 리메이크된 것이다.

이 노래가 유해하다, 아니다를 구분하려는 게 아니다.

원곡이 나오는 오페라의 내용 자체도 위정자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는 내용이고, 가사도 극 흐름상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곡과 가사가 따로 논다는 것이다.

나는 광고에서 처음 이 노래를 접했다.

가전제품 광고였는데 가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이 노래가 삽입되었다.

가사는 섬뜩한데 말이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공연 중 한 장면 <출처: topic/corbis>

엔니오 모리꼬네 씨가 그러셨나, 이루마 씨가 그러셨나 기억은 안 나지만 "곡은 추상화와도 같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선입견이 곡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곡의 이미지가 노래 전체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음악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미지도 그렇다.

선입견 때문에 하나님을 잘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병훈련소에서 동기 하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교회에서 '예수의 피, 피'거리는게 좀 징그러워."

당장 들을 때는 복음의 정수인 예수님의 보혈이 그런 취급을 받는게 기분이 언짢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으니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성품이 배제되면 예수의 피는 그저 잔인하다, 징그럽다는 생각 밖에 들지않는다.

당시 연평도 사건에, 집 걱정, 자대 배치 걱정, 각종 훈련으로 혼이 빠진 상태였지만 동기의 말을 듣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먼 나부터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사탄의 계략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별도 없으시고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요청할 수 있다.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탄을 구분하는 방법은 사실 매우 쉽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주신다.

반면 사탄은 우리를 억압하고 옥죄며, 끝내는 사망을 준다.

이렇게 몇 가지 성품만 비교해봐도 구분이 가능하다.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다.

 

첫째로, 사탄은 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신 제우스는 아직도 존재한다.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리스에 있는 제우스 신전은 이제 아무도 예배하러 오지 않는다.

대신 새 제우스 신전이 각자의 머리 속에 세워졌다.

TV를 틀면, 영화관에 가면 제우스가 나온다.

사탄은 매체를 이용해서 하나님과 제우스를 동일시해버렸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는 한손에 번개를 들고 인간을 벌하는 무서운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만화(제목은 기억 안 난다)에서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가 나왔는데 한동안 나는 그 헛깨비들이 하나님인줄 알았다.

제우스는 사탄의 만행 중 극히 한 부분에 불과하다.

사탄은 수없이 많은 매체와 문화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있다.

 

둘째로, 사탄은 텍스트를 조작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다.

이 방법은 하와에게도 썼던 방법이다.

"정녕 죽으리라"→"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탄은 선악과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이라고 하와를 속였다.

또한 사탄은 구약을 왜곡해서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무자비한 죽음의 신'으로 선전했다.

지금도 반기독교주의자들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 구약이다.

 

셋째로, 사탄은 권위자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다.

백성을 억압하는 왕, 부정부패한 재판관, 무능한 관리 등등...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사람은 좋은 권위자를 많이 만나지 못했다.

'권위자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라는 생각은 무의식 중에 자리잡아 하나님은 물론 대통령, 공무원, 단체의 리더, 심지어 축구 감독마저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누굴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서 신뢰 자체가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넷째로, 사탄은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다.

관계는 광범위하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 이웃 등등...

신실한 성도지만 친아버지에게 학대 당했던 기억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강하신 하나님

나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있었다.

나는 약한 이미지의 하나님이 너무 싫었다.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죽으신 성자 하나님이 보기 싫었다. 지는 것 같았다.

전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엘리야 때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악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이 좋았다.

집에 어릴 때 즐겨읽었던 만화로 된 성경이 있는데 엘리야가 나온 부분은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한데 반해 예수님 나오는 부분은 거의 새 거다.

스무 살이 되서야 우리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아더 왕의 엑스칼리버, 골리앗의 칼이 아닌 '사랑'(특히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로 표현한 영적 무기다)임을 알게되었다.

우리의 갑옷은 울버린의 아다만티움이나 아이언맨의 티타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사탄은 폭력이 강한 것이라고 하며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무너진 엘리야를 일으킨 것은 지진도,바람도,불도 아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다. 사랑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천둥벼락의 아들'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켰다.

휘청이는 '갈대' 베드로를 굳건한 '반석'으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주변에 전했다.

당시 초강대국 로마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 사랑을 전했다.

결국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간 것은 로마 군대가 아니었다.

로마제국은 다니엘의 환상(다니엘 2장)대로 처음에는 강철같았지만 나중에는 진흙처럼 되어버렸다.

공중에 뜬 짱돌처럼 약해보이는 복음이 강철같은 로마를 부쉈다.

복음은 점점 커져 온세상에 가득 찼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강하신 분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너는 알아라.내가 너의 선한 목자임을 알아라."

내가 입대하기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내게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다.

군복무 2년(정확히는 21개월 보름)내내 나의 하나님은 나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머리를 으깨시고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어주셨다.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임의 마음 속에 긍휼함을 부어주셔서 나를 아주 잘 대하게 하셨다.

말하는게 정말 물어뜯는 사자같은 간부가 있었는데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다른 안 좋은 일까지 겹쳐서 정말 이런 말하면 안되지만 순간 나쁜 마음까지 들었었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렸더니(사실 욕부터 나왔는데 성령께서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사자의 마음에 이미 내 마음을 두었다." 고 응답하셨다.

정말 그 간부가 아주 상냥한 말투로 괜찮다며 해결방법까지 가르쳐줬다.

그 간부와 같이 일하는 병사도 "저분이 저럴리가 없는데...신기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하나님은 만물을 움직여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왕임을 깨달았다.

일하는 왕이신 하나님

또한 하나님은 선임과 간부들을 통해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셨다.

너무나 착한 선임들, 솔선수범하는 군대선임들을 보내주셨다.

그들은 비록 나보다 많이 어리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우러러 볼 만한 것이었다.

그런 선임이 하는 말은 '권위적'이지 않았다. '진짜 권위'가 있었다.

신뢰가 갔으며, 존중(선임 대우)을 넘어선 존경심(닮고싶다)을 느꼈다.

이들을 통해 '일하는 왕'이신 하나님을 보았다.

기꺼이 멍에를 메고 밭을 기경하는 왕.

왕중의 왕인데도 불구하고

겸손하시고 성실하신 그분에게 나는 '위엄'을 느낀다.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깨닫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역하고 나서도 긍정적인 모습의 권위자를 계속해서 보여주셨다.

나는 권위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있었다.

하나님은 마트점장님을 통해 계속해서 먹이고(자취생은 굶으면 안된다고 거의 매일 자비로 점심저녁 사주셨다.일이 굉장히 고되었지만 오히려 살이 쪘다), 챙겨주고(민감한 부분이지만 중요한 월급!), 이해해주는(이분도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었는데 일에 치이기도 했고 상사 눈치도 보여서 결국 포기하셨단다.그래서 학교시간만은 칼같이 챙겨주셨다.이 점이 특히나 감사했다) 권위자를 깨닫게 하셨다.

비록 믿는 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내 머리 위에 세우신 권위자다.

지금은 점장님과 그 가정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한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통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요리해주고 만들어주는 것이 아버지에겐 노동이 아닌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를 깨닫게 하셨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회복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곧 망가진 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심으로써 내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왜곡된 이미지를 올바르게 바꾸셨다.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권위자를 통해, 관계를 통해, 말씀을 통해, 매체를 통해 내 속에 당신의 형상을 다시 만드셨다.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그것을 닮게 하셨다.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가니 일그러졌던 나의 형상도 온전하게 회복되어갔다.

내 아버지되시는 분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사실이 나를 평안하게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부럽지 않았다.

영국 윌리엄 왕자가 부럽지 않았다(사실 키는 아주 쵸큼 부럽다).

환난 중에도 불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그럴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다니는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했다.

"너희는 야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