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기독교

영어 이름 크리스토퍼(Christopher)에 얽힌 이야기

아이자야 2023. 4. 25. 03:20

영어 이름 크리스토퍼(Christopher)에 얽힌 이야기

 

신학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재환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해주신 이야기다.

옛날에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술이 아주 뛰어나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군이 되었다.

하루는 장군 자신이 섬기는 왕과 함께 말을 타고 숲을 거닐고 있었는데, 왕이 무엇을 보고 크게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

넘치던 위엄은 어디가고 왕은 땅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이 광경에 장군도 놀라 왕에게 물었다.

“폐하, 무엇을 보고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왕이 떨며 대답했다.

“저, 저기 덤불 뒤에 악마가 있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여 섬기던 왕이었다.

그런데 그런 왕이 보고 두려워 떠는 존재라...

 

장군은 그 즉시 왕을 버리고(헐..) 악마의 뒤를 몰래 쫓아갔다. 악마는 깊은 숲을 지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악마는 어떤 건물을 보고 벌벌 떨다가 급기야는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장군은 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보다 강한,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했던 악마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니.

악마는 이미 멀리 도망쳐버린 뒤라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때, 악마가 보고 도망친 건물에서 사람이 한 명 나왔다.

장군은 냉큼 그 사람에게 뛰어가서 물었다.

“내가 방금 악마의 뒤를 밟고 있었는데 악마가 당신이 나온 건물을 보더니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곳이 어떤 곳이기에 악마가 무서워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이곳은 교회라고 하는 곳입니다. 악마는 교회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도망쳤을 겁니다.” 장군이 다시 물었다.

“십자가가 뭡니까?”

그가 다시 대답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사형대입니다.” 장군은 또 다시 놀랐다. 예수라는 사람이 얼마나 강하기에 그가 달려 죽은 사형대만 보고도 악마가 두려워 떠는 것인가?

“그럼 그 예수라는 분은 만날 수 없습니까?”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 수 있습니다.”

 

장군은 그 날로 예수를 찾아 방방곡곡 돌아다녔다(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같다).

무작정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생계에 쪼들리게 되자 장군은 시냇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냥이나 나무를 하며 지냈다(직업이 잘 기억 안 난다ㅠㅠ).

장군이라는 직위가 가진 힘과 명예는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장군은 그동안 큰 저택에서 살다가 이제는 오두막에서 살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은 식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아주 많이 내렸다.

비로 인해 시냇물이 불어났다.

그는 오늘 하루 일거리는 공쳤다 싶어서 오두막에서 쉬고 있었는데 누가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한 소년이 한참 운 듯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소년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건너 마을에 있는 의원에게서 약을 구해와야 하는데 평소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던 시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가 없어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쿨 하게 소년보고 자기에게 업혀서 시내를 건너자고 말했다.

아무리 시냇물이라도 물이 불면 위험한데 이 사람의 기골이 매우 장대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으니 장군을 했겠지.

어릴 때 ‘장군감’이라는 소리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암튼 그렇게 시내를 함께 건넜다.

소년은 의원에게서 약을 받아가지고 장군이었던 남자가 기다리는 시냇가로 다시 왔다.

비는 그동안 그치지도 않고 계속 내려 물은 더욱 더 불어나 있었다.

그는 그래도 쿨 하게 소년을 업고 시내 가운데로 점벙점벙 걸어 들어갔다.

역시 물이 많이 불어 이전에 건널 땐 명치까지 왔던 물이 이제는 턱 밑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우직하게 물살을 가르며 시내를 건너고 있는데 업고 있던 소년의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기분 탓인가?’

그런데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몸무게가 처음엔 소년 같았다가, 다음엔 십대 청소년 같았다가, 이제는 다 큰 어른처럼 무거워져 가는 것이었다.

장군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등엔 소년은 온데간데 없고 웬 성인남자가 업혀있었다.

“우왘!! 당신 누구요!?” “나는 네가 만나고자 하는 예수다.” 장군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힘이 나서 단숨에 시내를 건너 예수님을 내려드렸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업었으니 이제부터 네 이름을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고 하겠다.”

장군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크리스토퍼의 원형인 ‘크리스토퍼런스(Christoferens)’는 구원자 예수님을 뜻하는 ‘크리스트(Christ)’와 운반자를 뜻하는 ‘퍼런스(Ferens)’가 합성된 말이다.

아마도 이 크리스토퍼 아저씨는 하사받은 이름대로 예수님, 곧 복음(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운반하는 자, 복음 전도자가 되지 않았을까?

예수를 업은 크리스토퍼

나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로, 세상의 강함과 천국의 강함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졌다.

‘강함이 최고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존재를 섬기자.’ 그는 이 강함을 통해 장군이 되었고 부와 힘과 명예도 얻었다.

왕이 따로 크리스토퍼와 같이 숲을 거닌 것을 보면 그는 무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다 올라갔고 누릴 것은 다 누려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에게 멘탈 붕괴가 찾아왔다. 바로 위에서 말한 두 사건이다.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왕이 패배했다.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악마가 패배했다.

폭력(무력)의 최정점에 있는 자들이 패배했다.

그는 패배가 아닌 ‘승리’를 원했다.

위 두 사건을 겪고 그는 예수님이 가장 강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예수님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존재일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폭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찾아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앞에 나타나실 때 산을 부수고 바위를 가르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지축을 흔드는 강력한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그치고 불이 일어났으나 불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작고 세미한 음성(왕상 19:12)으로 엘리야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엘리야를 다시 일으킨 것은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 속삭이신 사랑의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자, 가장 약한 자의 모습을 하고 그에게 찾아오셨다.

‘폭력’(세상에서 말하는 강함)이 아닌 사랑(천국에서 말하는 강함. 여기서는 인정과 베풂으로 나타남)이 진정 강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다.

세상을 이기신 강한 분이 세상을 이기신 비결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강한 분을 섬기는 방법은 지극히 작은 자, 약한 자를 섬기고 베푸는 것임을 보여주셨다(마 25:40).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순수한 열망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었던 그에게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아름다운 이름도 지어주셨다.

 

둘째로, 크리스토퍼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전도서 3장11절에 나오듯이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즉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다.

진리가 하나님께 있는데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강함이 진짜 강한 것인 줄 알고, 세상 지혜가 제일인 줄 착각하며 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쓴 성경을 통해 인간과 소통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리셨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셨다. 그 성품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리셨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친히 보여주셨다.

바로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어리석은 장군 같은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신다.

장군에게 크리스토퍼라고 부르신 것 같이 우리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부르신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헵시바(내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고 쁄라(결혼한 여자)라고 부르신다.

이것이 은혜다.

무지한 자에게 넘치는 은혜다.

죄인에게 넘치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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