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같은 책이나 영화라도 어릴 때 접해서 얻는 것이 있고,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접해서 얻는 것이 있다.
벤허
영화 '벤허'를 어릴 적에 봤을 때는 해상전투와 전차경기의 호쾌하고 장엄한 장면에 환호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출애굽기에서 유다멸망의 부분을 입체적으로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나길래 얼마 전에 다시 봤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장면에 주목하게 되었다.
주인공이 끝내 원수와 로마를 용서하고 복수하는 것을 내려놓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보혈이 비에 젖어 흘러내려가 병자에게까지 이르고 병자가 고침받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어릴 적에 봤을 때 이 장면은 전혀 기억에 없다).
사운드 오브 뮤직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이건 어릴 때 여러번 봤지만 스토리가 별로 기억이 안 났다.
극이 사실적으로 흘러가다가 갑자기 등장인물들이 노래하는 모습이 어린 내겐 굉장히 낯설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좋았다는 것(특히 에델바이스), 배경이 아름다웠다는 것, 대령이랑 마리아랑 잘 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성인이 돼서 보니 주인공 마리아의 언행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두렵지만 그래도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 하나님께 계속 여쭈면서 나아가는 모습, 아이들을 이해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생기를 잃은 집안에 다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질 때!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시편 23편
영적 권위로 따진다면 위에 두 영화는 성경 앞에 포스터 한 귀퉁이도 못 올리겠지만 어릴 적 나에게는 시편 23편도 그저 친근한 말씀 중 하나 였다.
암송도 하고 찬송으로도 많이 부르던 말씀이었다.
시편 23편을 통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방 한 쪽 벽에 걸린 양 떼를 이끄는 인자한 주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같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저분과 대면해보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좋은 분일 것 같다.'였다.
그런데 며칠 전 시편 23편을 다시 읽었을 때는 그 '느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내게 베푸신 한 없는 은혜를 생각나게 했다.
선한 목자가 목숨을 바쳐 양을 지키듯이 변함없이 날 지키시고 친히 먹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둠컴컴한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더라도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기에 내가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시 23:5)'는 의미없는 단어의 조합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구절이 되었다.
길다란 지팡이를 가지고 양처럼 눈이 어두운 나를 의로운 길로 가게끔 하시는 하나님, 끝이 뭉툭한 막대기(몽둥이)로 사자나 곰을 물리치시는 만군의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이런 다윗의 확신은 나의 확신이 되었다.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렇게 좋으신 분의 품을 어찌 떠날 수 있는가?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찬 570장中 2절) 영화 '십계' 중 홍해를 건너는 장면.
십계
영화 연출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에 세트와 영화미술로 만든 이집트 왕국의 모습은 그 나름의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
불 붙은 떨기나무나 불기둥의 모습은 셀 애니매이션으로 만든 것 같다. 요즘 cg에 맛들린 눈으로 보니 많이 조잡하긴 하다.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었다.
물을 붓는 장면을 찍은 후 거꾸로 돌려 만들었다고 한다.
대규모 인원이 등장하는 롱테이크 씬이 곳곳에 있었다.
롱테이크는 화면을 끊지 않고 공간전환을 하지않은채 촬영하는 기법이다.
NG가 한 번만 나도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집중해야 하는 촬영기법이다.
이집트를 탈출할 준비를 하는 모습이나, 홍해를 건너는 모습, 금송아지를 만드는 모습 등이 있다.
영화적 허용
성경에는 없는, 영화적인 재미로 넣은 설정이 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갈 만한 설정이었다.
모세에게 대항하다가 갈라진 땅 틈으로 떨어져 죽은 고라, 다단의 과거 : 동족의 등을 쳐먹는 이집트의 앞잡이로 설정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첫 만남 : 모세의 종에서 나중에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어떻게 모세를 만나고 따르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개연성이 있었다.
모세가 감독관을 죽이고 도망친 과정 : 성경에는 감독관이 히브리 노예를 가혹하게 대하는 걸 모세가 보고 욱해서 죽이고는 땅에 묻는다.
이 살인사건이 파라오의 귀에 들어가자, 파라오는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한다.
모세는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광야로 도망친다.
영화에서는 감독관이 히브리 여자를 강제로 자기 집노예로 삼는데, 그녀는 여호수아가 연모하는 사람이었다.
여호수아가 감독관 집에 잠입해 그녀를 도망치게 하고 대신 자신이 잡히는데, 이때 모세가 개입해서 감독관을 죽이고 여호수아를 구한다.
다단이란 이집트 앞잡이가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이집트왕자에게 알린다.
모세는 결국 세자 자격과 왕족 신분을 잃고 광야로 추방당한다.
모세를 양아들로 삼았던 이집트 공주와 그녀의 부하병사들이 재앙을 피하고 출이집트한 설정 : 예전에 신학교에서 배웠는데, 출이집트한 사람들은 100% 히브리인(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이집트인, 그외 이집트에 체류했던 이방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함께 홍해바다를 건너고, 하나님의 율법 아래 한 백성이 된 것이다.
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잘 표현했다.
광야로 쫓겨난 모세
광야를 헤매며 사선에까지 내몰린 모세의 모습을 긴 시간을 들여 묘사했다.
마치 광야로 내몰린 예수님을 연상하게 했다(모세가 광야로 쫓겨나기 전 누군가가 십자가를 언급했다. 누가 이 대사를 쳤더라?).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하신건지 묻는 모세에게 아내 십보라는 이렇게 말한다.
''모세 당신의 처지는 나의 조상 이스마엘이 광야로 쫓겨났을 때와 같아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난 몸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부락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모세의 처지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모세의 말투
40세 : 이집트 왕자 모세
약간 하이톤에다가 경쾌하고 똑부러지는 말투에서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80세 : 장인어른의 양을 치는 목자 모세
웬만한 말은 그의 형 아론이 한다(성경에서 이르기를 아론은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80세 때 모세의 말투는 40세 때 만큼의 힘과 기백은 없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율법과 범죄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 만든 십계명 돌판과
인간이 만든 금송아지가 교차하여 나온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계명을 하나씩 써나가실 때마다 이스라엘이 그 계명을 어기는 장면도 교차하여 나온다.
자기 백성들이 범죄하는 걸 알면서도 계명을 쓰셨던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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