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기독교

압살롬의 반란? 혁명?

아이자야 2023. 5. 14. 20:01

내가 예전에 일했던 요양원에서 안하무인인데 치매까지 와서 힘들었던 어르신이 있었다. 

그는 요양원 오기 전 매일 같이 주민센터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공무원에게 폭언과 욕설을 일삼았던 어르신이다. 

어르신이 젊을 적에는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기에 가족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그 새x'라고 부르며 외면했다. 

요양원 내에서 어르신 마음대로 하게 놔두면 위험하기 때문에 제지를 해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민센터에서 했던 버릇 그대로 고성과 쌍욕 그리고 위협까지 하는데 직원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똑같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대체로 다혈질이다. 나도 다혈질이다. 

헐크가 되기 직전 브루스 배너의 말처럼, 난 언제나 화가 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걸쳐 천둥벼락 같고도 깨진 조각 같은 나를 모아 빚으시고 다듬어 나가셨다. 

이 이야기는 내 화를 잠재우는 자장가이며, 항상 질서가 어긋나려고 하는 나를 보듬는 이야기다. 

 

요즘 묵상하는 말씀은 아버지 다윗에게 복수한 압살롬 이야기다. 사무엘하 15장~19장 말씀이다. 

다윗은 가족끼리 발생한 문제를 아버지로서 제대로 치리하지 않고 방관만 했다. 

피해자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물론이고, 가해자인 첫째 아들의 처벌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은 이에 큰 분노를 느끼고 이복 형을 유인해 직접 처단했다. 

 

이후 압살롬은 외갓집으로 피신해 몇 년간 있었다. 

이 시점에서도 다윗은 아무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윗은 압살롬을 아들로서도, 왕자로서도, 범죄자로서도, 피해자의 오빠로서도 대하지 않는다. 

요압 장군의 중재 아닌 중재로 일단 압살롬을 다시 궁전으로 불러들였지만, 다윗은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형식적으로만 인사할 뿐 투명인간 취급한다.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간다고 하지만, 행동해야 될 때가 있다.

압살롬의 분노는 커져만 간다. 급기야는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려 술수를 쓴다.

그는 자신의 준수한 외모와 함께 화려한 행렬을 구성하여 시각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윗에게 가서 재판받기로 한 사람들을 중간에서 가로채 재판을 해주었으며, 이들에게 언론 플레이까지 서슴치 않는다. 

압살롬을 따르는 지지자들은 점점 불어났고,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압살롬은 혁명을 일으킨 걸까, 아니면 반란을 일으킨 걸까?

성경은 이를 반란이라고 말하고 있다. 

압살롬의 행적은 얼핏 모세의 행적과 비슷하다.

동족 또는 가족의 억울한 일을 풀어보려 하다가 가해자를 처단한 점,

이후 멀리 도망친 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모세는 변화되었다. 압살롬은 변화되지 않았다. 

혈기와 완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모세는 오랜 세월이 지나 변화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 

모세는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정당한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 노력했다. 

 

압살롬은 시간이 지나도 본래 자신의 문제 해결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예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분노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의 분노를 품고 돌아와서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복수했다. 

압살롬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지 않았다. 스스로 계략을 자고 이간질하여 지지자를 모았다. 

 

위에 서술했듯이 다윗은 잘못했다. 크게 잘못했다. 

압살롬이 분노를 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다. 

 

모든 것은 법에 따라야 한다. 

지도자는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정치해야하며, 공정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은 최선을 다해 법을 지켜야 한다. 

 

고대 법 중에 동형 보복법이라는 것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해를 입은 만큼 가해자에게 똑같이 복수하라는 법이다. 

이 법은 오늘날 종교근본주의자들의 광신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법이 아니며, 

사적 제재를 정당화하는 법도 아니다. 

오히려 피해 입은 것 이상으로 복수하려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공정한 재판, 공정한 처벌을 밑바탕에 둔 법이다. 

'공정' 너무너무 당연한 단어지만 옛부터 이 공정함이 지켜지지 않는 곳은 혼란과 폭력이 난무하여 생지옥이 되었다. 

 

창세기에는 이 공정함이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자기가 보복한 이야기를 자랑스레 들려준다. 

어떤 사람이 라멕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라멕은 그 사람을 똑같이 상처 입히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윗의 한창 때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 전역에 삼 년 동안이나 심한 가뭄이 든 것이다. 

조선시대 때에도 그렇고 가뭄이 들면 왕 탓이다. 왕이 덕이 없어서 그런거니 왕이 직접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 하늘도 감동하여 비를 내려준다는 인식이 이스라엘에도 있었나 보다. 

다윗은 하나님께 가뭄의 원인을 여쭙는다. 하나님께서는 선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울 왕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성들 사이에서 종 노릇하고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성경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사울은 오늘날 우리가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것을 자행하지 않았나 싶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는 이 땅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울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를 어긴 것이다. 

다윗 입장에서는 남이 싸지른 분변을 자기가 치워야 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현재 왕은 자신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나섰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지난 날 사건을 상기하며 어떻게 보상해주었으면 하는지 물었다. 

기브온 사람은 사울이 자기 아들들을 앗아갔으니, 사울의 아들 중에서 일곱 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다윗은 이를 받아들였고, 일정한 절차를 거친 후 가뭄은 해결되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중 일곱을 고른 기준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가 전투를 지휘하고 직접 싸우기도 하는 군인으로 활동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사울의 아들들은 사울 집권 때 대부분 요나단처럼 지휘권을 가진 군인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사울의 기브온 핍박 및 학살 사건에 가담했을 확률이 높다. 

다윗도 관련 증인 심문 또는 신하들과 회의하여 그중 특히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자들을 골라냈을 것으로 보인다. 

렘브란트의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위 두 그림은 같은 화가에 얼핏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배경을 알고 본다면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압살롬이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적법한 방법으로 누이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면, 다윗의 후계자는 솔로몬이 아닌 압살롬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 다윗이 사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직접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태복음 5장)에서 법을 넘어 그 이상으로 도와주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법을 올바로 지켜야 함이 기본 중 기본이며 그것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