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기독교

이단과의 토론

아이자야 2023. 4. 25. 02:13

2019.9.16.월. 21시45분~22시20분쯤 이단 하나님의교회의 전도자와 토론함

 

토론의 시작

마트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데 말끔한 정장차림의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어머니 하나님(?)에 관한 리포트를 쓰고 있으니 얘기나누면서 평가해달라고 접근했다.

나는 여러 명도 아니고 한 명이고 궁금한 점도 있어서 얘기해보기로 했다.

이단전도자가 나를 따라오는 모양새로 얘기하며 걸어올라갔다.

하나님의교회는 통일교의 원리강론과 비슷한 전술을 사용한다.

처음부터 핵심을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얘기하며 논리를 펴가는 방식으로 서서히 이단교리의 핵심에 빠져들게 하는 방법을 쓰는 터라 내가 거기서 동문서답한 것도 있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어서 간단하게만 추린다.

 

가장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

이단전도자 : 어머니 하나님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 중인데, 같이 얘기하면서 평가 좀 해달라.

나 : 하나님의교회에서 나왔나?

이단전도자 : 그렇다.

나 : 내가 알기로 선생님(이단전도자) 네는 장길자 씨를 신격화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건전하지 않은 교리이기에 나는 반대 입장이다.

이단전도자 : 구약에서는 주종 관계였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 하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부모자식 관계로 변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 따라 남자, 여자를 지으셨으니 하나님도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이 삼위 중에 어머니가 없다.

''그 어머니 하나님이 바로 '장길자'입니다!''라고 얘기하려고 밑밥을 까는 것 같아 보임.

나 :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은 현대에서 말하는 친근한 아버지, 남성성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권위에 절대 순종해야 하고 그렇게 순종할 때에 온전히 지켜주시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갑자기 신약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난 모습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하자, 이삭이 어떤 반항없이 아버지 뜻에 순종한 사건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 역시 아버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친히 보여주셨다.

창조자의 속성 일부가 피조물에게 구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 나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성별이란 개념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성별은 피조물의 속성이기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여기에 얽매일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둘 다 나타내실 수 있다.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양 중에 '따스한 성령님'이 있는데 자애롭고 부드러운 어머니 같이 인간을 보듬으시는 하나님이 나온다(이단전도자는 이 찬양을 알지 못한다고 함).

선생님(이단전도자)이 주장하시는 개념이 저희(정통기독교)에게도 전혀 새롭거나 낯선 개념이 아니다.

선생님의 논리는 결국 장길자 씨를 신격화하기위해 펴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라며 답변을 회피하고 처음했던 말을 또 하기 시작함.

 

하나님의 신성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이단전도자 :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이 삼위 중에 어머니가 없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버지 하나님이 있으면 분명 어머니 하나님도 있다.

나 : 그것은 이원론적인 얘기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딱딱 나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인간조차도 '메트로섹슈얼'과 같이 한 개인 안에 남성적인 면, 여성적인 면이 섞여있는데 하물며 영이신 하나님을 그렇게는 나눌 수 없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부자 관계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부 관계 같은 면도 느낀다.

감히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가대 각 4파트가 서로 다른 음을 내지만 결국 하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4파트가 하나가 되지만 이 하나는 또한 4파트가 되는데 이것이 신비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등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

선생님이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을때 성령님께서 ''왜 날 안 부르지? 서운하네.''라고 하실 분이 아니다. 성삼위께서는 서로를 기뻐하시고 삼위 각자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라는 말 안에 성부성자성령 하나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어머니 되시는 하나님,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이 다 들어있다.

 

문자와 상황의 차이

결국 내 말 꼬투리를 잡기 시작함.

내가 계속 ''제 생각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은 것임.

넌 잘못된 길을 가고있다고 공포감을 심어주려는 술수.

이단전도자 : 지금까지 형제님(나)이 말씀하신 것이 다 형제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있어서 그랬다.

나 : 여태까지 나는 선생님께 성경에 있는 내용만 가지고 말씀드린 것이다.

적어도 나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있다.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령님의 인도에 맡긴다.

이단전도자 : 형제님이 주장하시는 것은 성경에 '~이다.' 라고 정확히 쓰여있지 않다.

저는 성경에 쓰여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창세기 초반부와 요한복음 15장, 계시록 22장을 들며 자기 논리를 펴나감.

나 : 그게 바로 text(문자)와 context(상황)의 차이인 것이다.

선생님은 text만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

text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집중하다보면 문자주의가 되고 이단이 될 수 밖에 없다.

text 안에 들어있는 context 즉 상황과 문맥을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반드시 context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text로 시작하지만 context를 사용하여 청자들이 알아듣기 쉽고도 진리에 도달하게끔 하셨다.

이단전도자 : 어쨌든 형제님도 하나님이 가정을 중심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느냐.

나 : 맞지만 의도가 전혀 다르다. 선생님의 논리는 다 장길자 씨를 신격화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 그것은 성경말씀을 개인 신격화에 이용하는 것이다.

이단전도자 :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도 그 당시에는 진짜 메시아인지 알길이 없는 것 아닌가.

나 :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있다. 2개만 꼽자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본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 500여명의 증인들이 있었다.

 

태어난 생일을 모른다고 산 사람이 아닌가?

이단전도자 : (갑자기)예수님을 확실히 믿는가?

나 : 믿는다.

이단전도자 :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지 한 마디로 말해보라.

나 :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가(찬송가 가사 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란 가사를 생각하며 말함)?

이단전도자 : 어떻게 한 마디로 대답할 수가 없는가. 잘못되었다. 예수님에 관해 구약에 다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자신은 성결교단 목회자와도 토론해서 이겼다.

나 : 너무 포괄적인 질문이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에 대해 말하자면 여기서 밤을 샐 수도 있다.

선생님이 목회자와 토론해서 이겼다는 건 내가 그 자리에 없어서 믿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 목회자가 단 몇 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시는데 전혀 아니다.

선생님의 주장은 자기 태어난 생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너 생일이 언제야?''라고 질문하고선 대답하지 못했다고 ''너는 태어나지 않았어. 넌 죽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생님과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만 가보겠다.

 

토론의 끝

둘은 함께 꽤 많이 걸었다.

그때 나는 이단전도자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까 했던 말을 또 꺼내기 시작했다.

더는 토론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쳇바퀴만 돌 뿐이었다.

약속이 늦어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동네마트에 들렀다가 올 생각으로 나온건데 어느새 30분이 지났다.

비록 짧은 토론이었지만 행여나 그 이단전도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의 눈과 마음은 잘못된 확신이라는 벽으로 꽉 막혀있었다. 안타까웠다. 마음이 아팠다.

주님, 이 무익한 종이 속으로 기도하며 열심히 설득해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답답하고 애가 탑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마침내 눈을 열어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그의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눈을 가리운 견고한 진을 파하소서. 주님을 만나는 복을 주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